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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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 19.
KO-006 연개소문
○연개소문 캐릭터 제작기○ 연개소문 현재 재평가 작업이 가장 활발한 위인중의 한명입니다. 과거에는 과격한 이미지로 많이 기술 되었었는데 이는 중국과 신라의 입장에서 정리가 된 역사서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내려 온 관계로 그런 이미지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대한 평가를 고구려를 전성기를 이끌어온 사람으로 긍정적인 측면에서 다시 연구가 되어져 있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캐릭터화 작업에서도 진취적이고 강한면을 잡아보고자 했으며 특히 오른쪽의 캐릭터는 지금까지와는 작업되온 스타일을 벗어나 디자인적인 측면을 부각 시키고자 만들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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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 14.
KO-003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 캐릭터 제작기○ 광개토대왕은 기본형 제작 당시 말이 캐릭터의 얼굴을 가리고 더 부각되는 바람에 아쉬웠었던 캐릭터 였습니다. 왼쪽의 캐릭터가 말에게 가려졌던 캐릭터의 본 모습(?) 이었습니다. 오른쪽의 캐릭터는 거대한 고구려영토를 붓으로 그리면서 영토확장을 하는듯한 것을 표현 한것인데 딱딱한 느낌의 왼쪽 캐릭터보다 더 정감이 드는 캐릭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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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9. 9.
SH-004 김유신
김유신 (金庾信 , 595~673)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 본관 김해(金海). 김유신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신라의 명장으로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15세 때 화랑이 되어 몸과 마음을 닦았다. 학문이 깊고 무예가 뛰어난 그는 신라의 오랜 꿈인 삼국 통일을 위해 의지를 키워나갔다. 한 때 천관이라는 기생에게 마음을 빼앗겨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깊이 반성한 김유신은 자신을 태운 말이 술집 문 앞에 가서 멈추자 말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와 같은 결단성은 훗날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654년 진덕 여왕이 왕위를 이을 자식 없이 죽자,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상대등이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다. 그 후 소정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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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9. 3.
BE-004 계백
계백 (階伯 , ?~660) 백제말기의 장군.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의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고 있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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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9. 1.
BE-003 온조왕
온조왕 (溫祚王 , ?~28)백제의 시조(재위 BC 18∼AD 28).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朱蒙)의 셋째 아들이다. 북부여에서 동명성왕의 전처 소생인 유리(琉璃)가 졸본부여(卒本扶餘: 고구려)로 와서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종전에는 仁川으로 比定하였으나, 최근에는 충청남도 아산시 仁州面 지방이라는 說이 유력)로 가고, 온조는 하남(河南)의 위례성(慰禮城: 경기 廣州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청남도 천안시 笠場面 虎堂里라는 설이 유력)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어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이상은 모두 BC 18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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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8. 28.
BE-002 서동
서동(薯童 : 600 ~ 641) 백제 제 30 대 무왕. 휘는 장(璋). 아명은 서동(薯童).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그녀는 서울 남지가에 집을 짓고 홀로 살던 중 그 못의 용과 교통하여 무왕 장을 낳았다. 그의 재능이며 도량은 넓고 깊어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생활해 나갔다. 사람들이 거기에 착안하여 그의 이름을 서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세째 공주 선화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서울의 마을 아이들에게 그는 마를 나누어 주며《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소문을 신라의 서울인 금성(金城)에 퍼뜨렸다.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정배를 보냈는데, 정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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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8. 20.
KO-006 연개소문
연개소문 (淵蓋蘇文 , 603~665)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장군.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이다. 개금(蓋金) ·개소문(蓋蘇文)이라고도 한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 후에 태종무열왕)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 3) 신라와의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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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8. 20.
KO-005 을지문덕
을지문덕 (乙支文德 , ?~?) 고구려 명장.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의 우중문(于仲文) ·우문술(宇文述)이 113만 여의 수륙양군(水陸兩軍)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자 압록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 적군의 허실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거짓 패배를 가장하여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장군은 적장 우중문에게 ‘神策究天文妙算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라는 희롱의 시를 보냈다. 우중문이 비로소 술수에 빠진 것을 깨닫고 지친 군사로 회군(回軍)하자, 을지문덕은 살수(薩水:淸川江)에서 수나라의 후군(後軍)을 무찔러 대승하였다(薩水大捷).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詩文)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