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일상과 정보나눔/일상
2009. 8. 24.
2009년 8월 23일 일요일-DJ를 떠나보낸 그날...
지난 5월 노통에 이어 8월 DJ도 이 땅을 떠나셨다. 오늘 조문과 영결식 참여를 위해 시청으로 향하였고 그곳 분위기를 보니 확실하게 지난 노통과 다른 점이 격한 감정보다는 차분한 슬픔이 느껴지고 있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조문을 하였고(이 와중에 오세훈이는 본인의 치적물인 아리수 수돗물을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있었고 그 맛 역시 병맛이였음) 영구차량이 청와대는 안된다는 현정부의 옹졸함을 뒤로하고 시청앞으로 잠시 들렸다가 현충원으로 향하였다. 짭새들의 철저한 도로 통제로 영구차 가까이 따라가지는 못하고 시청에서 시민들과 함께 잠깐 뵙고 지하철을 통해 현충원으로 이동을 하였다. 긴 거리를 걸으며 그 분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렸지만 마음 한켠에 가라앉아 있는 울분과 아픔을 함께 나누어..
홈페이지 아카이브(1~3기)/시사시선
2008. 6. 26.
[▶◀] 지못미 대한민국 민주주의&쇠고기
[▶◀] 지못미 대한민국 민주주의&쇠고기 오늘자로 바뀐 제 메신저 대화명입니다. 2008년 6월 26일 오전 9시 부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쇠고기는 사망하였습니다. 허탈했습니다. 아니 좌절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니다! 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야!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거야!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이 고맙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나라 내 조국의 사랑하라는 말과 민주주의는 우리곁에서 살아있고 시대에 맞게 진화한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요근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민주주의가 나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을까? 굉장히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단어였던 '대한민국'과 '민주주의'... 이 두단어는 놀랍게도 저와..
홈페이지 아카이브(1~3기)/시사시선
2008. 5. 25.
[▶◀]어느 한 빨갱이의 슬픈 눈물
오늘.. 아니 어제 저녁에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어제 집회는 그동안 광우병쇠고기 관련으로 관망적으로 봐왔던 여자친구를 함께 데리고 와서 빨갱이라고 오해(?)받는 제가 왜 이곳에 수차례 나올 수 밖에 없었는 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저와 여자친구가 청계천 소라기둥 근처, 즉 DP 지정 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7시 30분... 에릭님은 오늘도 여전히 많은 분들의 연락을 받으면서 DP식구들을 문화제 장소로 가이드를 해주셨고 광우병쇠고기 반대를 알리는 소품(버튼, 스티커)을 자비를 털어서 만드셨던 도령귀신님은 여전히 지원물품을 제공해주시고 약속되신 일을 하려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매번 타이밍을 놓쳐서 못 뵙고 있는 분!!) 그밖에 시간이 지나면서 속속히 DP식구들이 도착하였지만 첫 느낌은 생각보다 사람이 ..
일상과 정보나눔/일상
2007. 12. 7.
2007년 12월 6일 목요일-일진 사나운 날
어제 검찰에서 BBK 관련 이명박의 무혐의를 발표하였다. 역시 많은 사람들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검찰은 김경준의 단독범행이고 이명박은 전혀 관련없음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김경준의 누나인 에리카김이 한국시간으로 오늘 새벽4시에 반박기자 회견을 하려고 하였다가 1시간 30분전에 전격취소하고 종적을 감추게 되므로 검찰이 이명박의 손을 들어줌으로 대세론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참 나라꼴 잘돌아간다. 이명박이 당선권에 가까워지니 검찰은 알아서 기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고 눈에 보이는 수많은 정황을 뒤로 하고 결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과거로 회귀하게 되는 전환점을 찍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오늘 재훈이의 재판이 있는 날이자 증인으로 가서 진술을 해주는 날이였다. 결과를 먼저 이야기하자면 오늘 ..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11. 6.
JO-022 김구
김구 (金九, 1876.7.11~1949.6.26) 독립운동가.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