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1.
BE-003 온조왕
온조왕 (溫祚王 , ?~28)백제의 시조(재위 BC 18∼AD 28).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朱蒙)의 셋째 아들이다. 북부여에서 동명성왕의 전처 소생인 유리(琉璃)가 졸본부여(卒本扶餘: 고구려)로 와서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종전에는 仁川으로 比定하였으나, 최근에는 충청남도 아산시 仁州面 지방이라는 說이 유력)로 가고, 온조는 하남(河南)의 위례성(慰禮城: 경기 廣州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청남도 천안시 笠場面 虎堂里라는 설이 유력)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어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이상은 모두 BC 18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8. 28.
BE-002 서동
서동(薯童 : 600 ~ 641) 백제 제 30 대 무왕. 휘는 장(璋). 아명은 서동(薯童).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그녀는 서울 남지가에 집을 짓고 홀로 살던 중 그 못의 용과 교통하여 무왕 장을 낳았다. 그의 재능이며 도량은 넓고 깊어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생활해 나갔다. 사람들이 거기에 착안하여 그의 이름을 서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세째 공주 선화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서울의 마을 아이들에게 그는 마를 나누어 주며《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소문을 신라의 서울인 금성(金城)에 퍼뜨렸다.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정배를 보냈는데, 정배 ..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8. 26.
BE-001 선화공주
신라 제26대진평왕(眞平王)의 공주이며,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비(妃). 진평왕의 셋째 딸로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이를 연모(戀慕)한 서동(薯童),즉 후일의 백제 무왕(武王)이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소문을 신라의 서울인 금성(金城)에 퍼뜨렸다. 진평왕은 선화공주의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정배를 보냈는데, 정배 가는 도중에 서동을 만나 결혼하였다. 서동은 후에 무왕이 되고, 따라서 선화공주는 그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물론 정사(正史)는 아니고 하나의 전설인데, 이병도(李丙燾)에 의하면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이고, 그의 왕비도 선화공주가 아니라 신라의 왕족인 이찬(伊) 비지(比智)의 딸이라고하였다.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8. 20.
KO-006 연개소문
연개소문 (淵蓋蘇文 , 603~665)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장군.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이다. 개금(蓋金) ·개소문(蓋蘇文)이라고도 한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 후에 태종무열왕)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 3) 신라와의 화..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8. 20.
KO-005 을지문덕
을지문덕 (乙支文德 , ?~?) 고구려 명장.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의 우중문(于仲文) ·우문술(宇文述)이 113만 여의 수륙양군(水陸兩軍)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자 압록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 적군의 허실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거짓 패배를 가장하여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장군은 적장 우중문에게 ‘神策究天文妙算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라는 희롱의 시를 보냈다. 우중문이 비로소 술수에 빠진 것을 깨닫고 지친 군사로 회군(回軍)하자, 을지문덕은 살수(薩水:淸川江)에서 수나라의 후군(後軍)을 무찔러 대승하였다(薩水大捷).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詩文)에도..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8. 20.
KO-004 왕산악
고구려시대 거문고의 제작자이며 관리 왕산악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다음과 같은 짧은 내용이 그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의 전부이다. 진(晉)나라 사람이 일곱 줄의 현악기를 고구려에 보내왔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줄은 알았지만 그 악기의 성음이나 연주법은 알 수가 없어서 그 음율을 알고 연주법을 아는 사람을 거국적으로 구해서 후상(厚賞)하기로 했다. 그때 제2재상으로 있던 왕산악이 칠현금의 뼈대를 그대로 유지한 채 크게 그 법제를 고쳐서 악기를 만들었다. 아울러 백여곡의 음악을 지어 연주하니 마침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다. 그래서 악기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 했고 후에는 단지 현금이라고 했다. 그가 언제 거문고를 만들었는지 삼국사기에 언급되지 않아 불확실하다...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8. 20.
KO-003 광개토대왕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3), 고국양왕(故國壤王)의 태자.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약칭이고, 그가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이다.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정벌에 나서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동예(東濊)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나라의 모용 희(慕容熙)를 반격하여 신성(新城) ·남소(南蘇)의 2성 ..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8. 20.
KO-002 온달장군
《삼국사기》 온달조(溫達條)에 따르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얼굴이 우습게 생겨 사람들이 그를‘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평원왕은 어린 공주가 울기를 잘하여 놀리느라고 ‘네가 울기를 잘하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 보내겠다’고 항상 말하였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어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다. 공주는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집과 밭을 마련하고 말을 사서 준마로 키웠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 되면 왕이 신하 및 병사들과 더불어 사냥을 하였는데 온달의 말타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서고 잡는 짐승도 많아서 왕이 불러 그 이름을 묻고 놀랐다. 그 때 중국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