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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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7.
JO-015 황희
황희 (黃喜 , 1363~145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호 방촌(尨村). 초명 수로(壽老). 시호익성(翼成). 개성(開城) 출생. 문과에 급제하여 상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숨어 살았으나, 이성계의 간청으로 조선의 벼슬에 올랐다. 사헌 감찰, 경기도 도사, 이조 정랑 등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다. 충녕 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귀양 갔으나, 그 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어 18년 동안이나 정승으로 있으면서 농사 개량, 예법의 개정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정승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여러 일화를 남겼다.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는 황희의 무덤이다. 팔걸이를 한 것 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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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4.
JO-014 권율
권율 (權慄 , 1537~1599 ) 조선시대 명장. 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158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 목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로 임명되어 방어사 곽영의 지휘 아래 용감히 싸웠으나 지고 말았다. 그러나 권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의병 1천여 명을 모아 금산군 이치에서 왜군을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다시 군사 8천여 명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다가 도중에 수원 독왕산성에 주둔하여 튼튼한 진지를 쌓으면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왜군과 맞서 싸워서 물리쳤다. 1593년에는 2천8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여기서 3만에 이르는 왜군과 맞서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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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3.
JO-013 세종대왕
세종 世宗 1397∼1450(태조6~세종32)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장헌(莊憲). 태종의 셋째아 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며, 비(妃)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지고, 12년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해졌다. 18년,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정치· 경제· 문화 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42년에 이천()· 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였으며,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43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를 제정하였고, 46년에 이를 반포하였다. 학문의 장려에 힘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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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2.
JO-012 신윤복
신윤복(申潤福, 1758~?) 조선 후기의 풍속(風俗)화가.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입부이며, 호는 혜원이다. 그림에 뛰어난 3원 중의 한 사람으로,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 풍속 화가로 손꼽힌다. 화원으로서 첨정 벼슬을 지냈다.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주로 농촌 마을의 서민적인 풍속을 많이 그렸으며, 특히 기생, 무당, 술집 등의 풍속도를 잘 그렸다. 그가 현실 인간 사회의 모습을 화폭에 즐겨 담은 것은, 그 당시 엄격하고 높은 도덕만을 중요시하던 양반 사회를 꼬집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해 섬세하고 부드러운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를 즐겨 사용했다. 때문에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작품에는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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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1.
JO-011 김정호
김정호 (金正浩 , ?~1864)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본관 청도(淸道). 자 백원(伯元) ·백온(伯溫). 호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출생. 어려서 서울로 이주하였고,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0여 년간의 각고 끝에 1834년(순조 34)에 《청구도(靑邱圖)》 2첩을 완성하였다. 그 후 《청구도》에 불만을 느낀 그는 다시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첩을 완성하고, 교간(校刊)하였다. 《대동여지도》는 크기가 20×30cm 정도이며, 1첩에는 간기(刊記)가 있고, 각 첩 1편(片)의 넓이는 32×48㎢에 해당한다. 또 22종류의 부호를 사용하여 역 ·창고 ·목장 ·성 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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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0.
JO-010 임꺽정
임꺽정 ( ?~1562) 조선시대의 의적(義賊). 일명 거정(巨正). 양주(楊州)의 백정(白丁)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559년(명종 14)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한때는 개성(開城)에 쳐들어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을 살해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호응으로 관군(官軍)의 토벌을 피했으나 1560년 형 가도치(加都致)와 참모(參謀) 서림(徐林)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1562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九月山)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그의 이름이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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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18.
JO-009 김홍도
본관 김해(金海).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된 뒤 1771년(영조 47)에 왕세손(뒤의 正祖)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정조5)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1788년 스승 김응환(金應煥)이 왕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거기서 병으로 죽자 홀로 쓰시마섬[對馬島]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왔다. 1797년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 산수화 ·인물화·신선화(神仙畵) ·불화(佛畵) ·풍속화에 모두 능하였고,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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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16.
JO-008 전봉준
1854∼1895. 조선 후기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지도자로 어릴 적 이름은 명숙(明叔), 호는 해몽(海夢)이고, 유난히 몸이 왜소하고 키가 작다해서 녹두라 불렀고, 녹두장군(綠豆將軍)의 별명이 생겼다. 부친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당하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 1892년 고부 조병갑의 횡포를 지켜보다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1894년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전주를 점령하는 등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일본군과 연합한 정부군의 반격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전봉준은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전봉준의 자주적인 혁명정신과 애국심은 그 뒤에 3·1 운동과 독립투쟁으로 생생하게 이어지고 오늘날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