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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10. 20.
JO-010 임꺽정
임꺽정 ( ?~1562) 조선시대의 의적(義賊). 일명 거정(巨正). 양주(楊州)의 백정(白丁)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559년(명종 14)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한때는 개성(開城)에 쳐들어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을 살해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호응으로 관군(官軍)의 토벌을 피했으나 1560년 형 가도치(加都致)와 참모(參謀) 서림(徐林)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1562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九月山)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그의 이름이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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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18.
JO-009 김홍도
본관 김해(金海).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된 뒤 1771년(영조 47)에 왕세손(뒤의 正祖)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정조5)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1788년 스승 김응환(金應煥)이 왕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거기서 병으로 죽자 홀로 쓰시마섬[對馬島]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왔다. 1797년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 산수화 ·인물화·신선화(神仙畵) ·불화(佛畵) ·풍속화에 모두 능하였고,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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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16.
JO-008 전봉준
1854∼1895. 조선 후기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지도자로 어릴 적 이름은 명숙(明叔), 호는 해몽(海夢)이고, 유난히 몸이 왜소하고 키가 작다해서 녹두라 불렀고, 녹두장군(綠豆將軍)의 별명이 생겼다. 부친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당하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 1892년 고부 조병갑의 횡포를 지켜보다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1894년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전주를 점령하는 등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일본군과 연합한 정부군의 반격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전봉준은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전봉준의 자주적인 혁명정신과 애국심은 그 뒤에 3·1 운동과 독립투쟁으로 생생하게 이어지고 오늘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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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15.
JO-007 김정희
김정희(1786-1856)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실학(實學)과 금석학(金石學)에 큰 업적을 쌓은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화가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 등 백여 가지를 썼다. 어려서 부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실사구시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병조참판 등 높은 벼슬을 지내고 24세 때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 당시 중국의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 등과 돈독히 교류하였고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법을 익혔다. 1840년에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역대의 명필을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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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14.
JO-006 안중근
한말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安重根, 1879 ~ 1910.3.26]은 본관 순흥(順興)이며, 아명 안응칠(安應七)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출생했다.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商)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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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13.
JO-005 장영실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로 경상도 동래현의 기생 아들로 태어나 관노라는 미천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주가 뛰어나 과학에 특히 관심을 기울인 세종 대왕에 의해 1423년(세종5) 발탁되어 노예신분을 벗었다. 그 후 행사직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의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의 제작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물건을 만든다고 많은 업신여김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장영실은 굴하지 않고 세종의 격려를 받으며 열심히 작업에 몰두했다. 1433년에는 호군에 올랐으며, 혼천의 제작을 완성했다. 이듬해 갑인자의 주조를 지휘감독하는 한편, 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 완성했다. 이후 천체관측용의 대.소간의, 해시계인 천평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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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10.
JO-004 김시습
조선전기의 학자(1435 ~ 1493)로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김시습은 청년기때 가정적 역경 속에서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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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9.
JO-003 사명대사
조선중기의 승려(1544∼1610)이자 의병장이었으며, 유정은 법명이고 본래 이름은 임응규, 호가 사명당이었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3세 때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의 제자가 되었으며, 1561년 승과에 급제하였다. 1575년에 묘향산 보현사로 가서 휴정(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고 금강산·태백산 등 명산을 찾아 다니며 도를 닦다가, 충북 옥천의 상동암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제자들을 해산 시킨 뒤 홀로 참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서산대사의 휘하에 들어가 왜군에게 빼앗긴 평양을 되찾는 한편, 권율과 힘을 합쳐 의령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정유재란 때에도 울산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쳐 공을 세웠으며, 1604년 국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