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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10. 31.
JO-018 정조
정조 (正祖, 1752 ~ 1800) 조선의 제22대 왕. 이름 산().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1759년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어린 나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수업에 들어갔다. 1775년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 22대 왕으로 등극했다. 왕위에 오른 정조 임금은 문예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 했는데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정치를 펼쳐 나갔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으며 남인계열의 채제공을 비롯한 실학자들을 등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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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30.
JO-017 이이
dl 이이 (李珥 , 1536~1584 )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3살때 부터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하고 여덟 살 때는 시를 짓고 13세때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등 29세에 관직에 나서기까지 9번을 장원급제 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또한 지극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무덤 옆에서 3년상을 지내기도 하였다. 모친 3년상을 마친 뒤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 사상을 연구하다가 1년후, 유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속세로 돌아와 학문에 힘을 썼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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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8.
JO-016 이황
이황 (李滉 , 1501 ~ 1570)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자는 경호(景浩)이다. 진보(眞寶) 또는 진성이 선생의 관향(貫鄕)이며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옹(陶翁)이라 하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이황은 1501년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이식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작은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고, 혼자 책읽기를 좋아했다. 1533년 진사로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은 이황은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 호조 좌랑 등을 거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승진을 계속하던 이황은 36세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이황은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아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인종에 이어 1545년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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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7.
JO-015 황희
황희 (黃喜 , 1363~145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호 방촌(尨村). 초명 수로(壽老). 시호익성(翼成). 개성(開城) 출생. 문과에 급제하여 상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숨어 살았으나, 이성계의 간청으로 조선의 벼슬에 올랐다. 사헌 감찰, 경기도 도사, 이조 정랑 등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다. 충녕 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귀양 갔으나, 그 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어 18년 동안이나 정승으로 있으면서 농사 개량, 예법의 개정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정승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여러 일화를 남겼다.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는 황희의 무덤이다. 팔걸이를 한 것 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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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4.
JO-014 권율
권율 (權慄 , 1537~1599 ) 조선시대 명장. 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158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 목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로 임명되어 방어사 곽영의 지휘 아래 용감히 싸웠으나 지고 말았다. 그러나 권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의병 1천여 명을 모아 금산군 이치에서 왜군을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다시 군사 8천여 명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다가 도중에 수원 독왕산성에 주둔하여 튼튼한 진지를 쌓으면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왜군과 맞서 싸워서 물리쳤다. 1593년에는 2천8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여기서 3만에 이르는 왜군과 맞서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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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3.
JO-013 세종대왕
세종 世宗 1397∼1450(태조6~세종32)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장헌(莊憲). 태종의 셋째아 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며, 비(妃)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지고, 12년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해졌다. 18년,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정치· 경제· 문화 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42년에 이천()· 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였으며,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43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를 제정하였고, 46년에 이를 반포하였다. 학문의 장려에 힘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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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2.
JO-012 신윤복
신윤복(申潤福, 1758~?) 조선 후기의 풍속(風俗)화가.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입부이며, 호는 혜원이다. 그림에 뛰어난 3원 중의 한 사람으로,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 풍속 화가로 손꼽힌다. 화원으로서 첨정 벼슬을 지냈다.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주로 농촌 마을의 서민적인 풍속을 많이 그렸으며, 특히 기생, 무당, 술집 등의 풍속도를 잘 그렸다. 그가 현실 인간 사회의 모습을 화폭에 즐겨 담은 것은, 그 당시 엄격하고 높은 도덕만을 중요시하던 양반 사회를 꼬집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해 섬세하고 부드러운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를 즐겨 사용했다. 때문에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작품에는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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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1.
JO-011 김정호
김정호 (金正浩 , ?~1864)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본관 청도(淸道). 자 백원(伯元) ·백온(伯溫). 호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출생. 어려서 서울로 이주하였고,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0여 년간의 각고 끝에 1834년(순조 34)에 《청구도(靑邱圖)》 2첩을 완성하였다. 그 후 《청구도》에 불만을 느낀 그는 다시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첩을 완성하고, 교간(校刊)하였다. 《대동여지도》는 크기가 20×30cm 정도이며, 1첩에는 간기(刊記)가 있고, 각 첩 1편(片)의 넓이는 32×48㎢에 해당한다. 또 22종류의 부호를 사용하여 역 ·창고 ·목장 ·성 등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