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16.
SH-006 의상대사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신라시대의 승려. 화엄종(華嚴宗)의 개조. 당(唐)나라에 가서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현수(賢首)와 더불어 화엄종을 연구하고 671년 귀국했다. 676년(문무왕 16) 왕명에 따라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화엄종을 강론, 해동(海東)화엄종을 창시하고 전국에 10여 개의 화엄종 사찰을 건립, 화엄의 교종을 확립했다. 그의 문하에서 오진(悟眞)·지통(知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의상십철(義湘十哲)’이라 일컫는 10대덕(大德)의 고승이 배출했다. 고려 숙종으로부터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주요저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15.
SH-005 최치원
최치원(崔致遠 857~?)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 ·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9.
SH-004 김유신
김유신 (金庾信 , 595~673)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 본관 김해(金海). 김유신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신라의 명장으로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15세 때 화랑이 되어 몸과 마음을 닦았다. 학문이 깊고 무예가 뛰어난 그는 신라의 오랜 꿈인 삼국 통일을 위해 의지를 키워나갔다. 한 때 천관이라는 기생에게 마음을 빼앗겨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깊이 반성한 김유신은 자신을 태운 말이 술집 문 앞에 가서 멈추자 말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와 같은 결단성은 훗날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654년 진덕 여왕이 왕위를 이을 자식 없이 죽자,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상대등이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다. 그 후 소정방..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8.
SH-003 장보고
장보고(張保皐 , ?~846) 신라의 무장. 일명 궁복(弓福)·궁파(弓巴).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37년(희강왕 3)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5.
SH-002 원효대사
617∼686년.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씨.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誓幢).648년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典籍)을 섭렵하여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는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34세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후 스스로 복성거사(卜性居士)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행세를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특히 그의은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4.
SH-001 문무왕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으로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 ·문명왕후(文明王后)의 맏아들, 비(妃)는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았다. 650년(진덕여왕 4)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을 받았고, 654년(태종무열왕 1)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655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60년 나 ·당(羅唐)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5만 군대를 거느리고 분전, 백제를 격멸하였다. 662년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그 뒤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의 백제 부흥운동을 저지하였다. 668년 다시 나 ·당연..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3.
BE-004 계백
계백 (階伯 , ?~660) 백제말기의 장군.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의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고 있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1.
BE-003 온조왕
온조왕 (溫祚王 , ?~28)백제의 시조(재위 BC 18∼AD 28).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朱蒙)의 셋째 아들이다. 북부여에서 동명성왕의 전처 소생인 유리(琉璃)가 졸본부여(卒本扶餘: 고구려)로 와서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종전에는 仁川으로 比定하였으나, 최근에는 충청남도 아산시 仁州面 지방이라는 說이 유력)로 가고, 온조는 하남(河南)의 위례성(慰禮城: 경기 廣州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청남도 천안시 笠場面 虎堂里라는 설이 유력)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어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이상은 모두 BC 18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