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30.
CO-007 최영
최영 (崔瑩 , 1316~1388) 고려의 명장 ·충신. 본관 동주(東州). 시호 무민(武愍). 수 차례의 외적 침입을 막아내고 난을 평정하는 등 고려왕조의 지켜낸 장수였을 뿐더러 아버지의 유언인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1381년 영삼사사(領三司事) 등을 지내고 벼슬을 사퇴했다가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는데, 이 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 북변 일대를 랴오둥[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랴오둥정벌을 계획,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이성계 등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랴오둥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성계군이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高峰:高陽)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26.
CO-006 정지상
정지상 (鄭知常 , ?~1135) 고려시대의 문신·시인. 본관 서경(西京). 호 남호(南湖). 초명 지원(之元). 서경 출생. 1114년(예종 9) 문과에 급제, 1127년(인종 5) 좌정언(左正言)으로서 척준경(拓俊京)을 탄핵하여 유배되게 하고, 1129년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시정(時政)에 관한 소를 올렸다. 음양비술(陰陽術)을 믿어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과 삼성(三聖)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서울을 서경으로 옮길 것과 금(金)나라를 정벌하고 고려의 왕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하였다. 1130년 지제고(知制誥)로서 《산재기(山齋記)》를 지었으며, 뒤에 기거랑(起居郞)이 되었다. 1135년(인종 13) 묘청의 난 때 이에 관련된 혐의로 김안(金安)·백수한과 함께 김부식(金富軾)에게 참살되었다...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25.
CO-005 김부식
김부식 (金富軾 , 1075~1151)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본관 경주.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1096년에 급제하여 참군사·직한림에 발탁되었다. 1134년 묘청이 서경천도설을 주장하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수충 정난 전국 공신의 호를 받았다. 1145년에는 왕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인 50권을 편찬 하였다. 이 밖에도 인종 초년에 을 편찬하였고, 의종 초년에는 을 편찬하였다.'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인데 현재 남아 있는 우..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23.
CO-004 정몽주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영천에서 태어나 24세 때 3번의 과거에 연달아 장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377년에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자은 침략에 항의하고 그 곳에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의 백성 수백 명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383년에는 함경도에 쳐 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이듬해 명나라에 가서 조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조공을 면제받고 명나라와 국교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의창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1392년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자 이를 반대하고 끝까지 고려 왕조를 지키려 하다가..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22.
CO-003 문익점
고려 말기의 학자.문신. 자 일신, 호 삼우당, 시호 충선. 본관 남평. 우리 나라에 목화씨를 퍼뜨린 사람. 경상도 강성 고을에서 선비인 문숙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1339년(충숙왕 복위 8) 11세 때 이름난 학자인 이곡의 제자가 되었다. 16세에 결혼하고 1348(충목왕 4)에 개경에 올라가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1360년(공민왕 9) 32세 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원나라가 공민왕을 내치고 덕흥군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그에 반대하다가 중국 남방으로 귀양갔다. 1364년 귀양살이에서 풀려날 때 목화씨를 붓대 속에 숨겨 가지고 와서 재배에 성공, 10년이 지난 뒤에는 전국에서 목화 재배가 이루어졌다. 그는 또 후..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20.
CO-002 최무선
고려말의 무기발명가. 본관은 영주(永州:지금의 영천)이며, 광흥창사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아들 최해산(崔海山)과 손자 최공손(崔功孫)도 화약과 화기의 연구에 참여하였다. 중국에서는 화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객들 중에서 초석(염초)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었다. 후한 대접 등 그의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감동시켜 흙으로부터 추출(抽出)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에 대해 연구하고 또 그것들을 만들 수 있도록 화통도감의 설치를 여러 차례의 건의 끝에 허락을 받아 1377년부터 화약과 무기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17.
CO-001 이규보
고려시대의 문신 ·문인(1168-1241)으로 본관은 황려(黃驪=여주)이고, 초명은 인저(仁?)이고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다. 9세때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하였고, 문재가 뛰어남을 보였으며, 14세때 성명재의 하과(여름철 절을 빌려 하는 과거시험준비 학습)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들이 그를 기재(奇才)라 하는 등 장래가 촉망되었다. 관직 운이 없던 그는 25세 되던 해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26세(명종23년)쯤 개경으로 돌아와 많은 문인ㆍ승려들과 교제하였고 이때 ‘동명왕편’을 지었다. 1196년 최충헌의 쿠데타로 새 정치세력으로 무관층을 흡수ㆍ정리하면서 문인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이때 이규보는 출세길을 달리게 되었다지만 곧 좌..
맨끝에 디자인 갤러리/캐릭터-한국 역사인물
2003. 9. 17.
SH-007 마의태자
마의태자 (麻衣太子 ?~?) 신라 56대 경순왕의 태자. 935년(경순왕 9) 10월 신라는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하였다.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전달되었다. 태자는 통곡하며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