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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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 6.
JO-022 김구
김구 (金九, 1876.7.11~1949.6.26) 독립운동가.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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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 5.
JO-021 조광조
조광조 (趙光祖 , 1482~1519) 조선중기 중종 때의 문신.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김굉필에게서 글을 배운 뒤 성리학 연구에 힘써 사림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515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과 감찰 등에 올랐으며,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 뒤 예조 정랑과 부제학 등을 지냈으며, '여씨향약'을 실시하게 하고, 미신 타파에 힘썼다. 1519년에 대사헌이 되어 현량과라는 과거를 실시하여 30대의 젊은 학자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히는 한편, 훈구파를 정계에서 몰아 냈다. 그러자 훈구파에서는 그가 왕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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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 4.
JO-020 정약용
정약용 (丁若鏞 , 1762~1836) 조선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翁)·태수(苔)·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17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여러 책을 읽어 학문을 익히는 반면에 아버지를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배워 모든 분야에서 고루 밝은 사람이었다. 22세의 나이로 정조 임금에게 중용을 강의하기도 하였는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덕과 평범한 곳에 참됨이 있다는 것을 논하는 학문이었다. 정약용은 서양의 천문, 지리, 농사정책, 수리 기술, 측량법 등에 깊은 관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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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 3.
JO-019 송시열
송시열 (宋時烈 , 1607~1689 ) 조선후기의 문신·학자, 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본관(本貫)은 은진(恩津)이며 자(字)는 영보(英甫)이고 호(號)는 우암(右菴)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으로 1607년 선조(宣祖) 40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九龍村) 그의 외가 곽씨문중에서 출생한 조선중기의 대유학자이다. 8세때 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낙향하여 10년간의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해 2월 김자점 일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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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31.
JO-018 정조
정조 (正祖, 1752 ~ 1800) 조선의 제22대 왕. 이름 산().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1759년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어린 나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수업에 들어갔다. 1775년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 22대 왕으로 등극했다. 왕위에 오른 정조 임금은 문예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 했는데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정치를 펼쳐 나갔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으며 남인계열의 채제공을 비롯한 실학자들을 등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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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30.
JO-017 이이
dl 이이 (李珥 , 1536~1584 )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3살때 부터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하고 여덟 살 때는 시를 짓고 13세때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등 29세에 관직에 나서기까지 9번을 장원급제 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또한 지극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무덤 옆에서 3년상을 지내기도 하였다. 모친 3년상을 마친 뒤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 사상을 연구하다가 1년후, 유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속세로 돌아와 학문에 힘을 썼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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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8.
JO-016 이황
이황 (李滉 , 1501 ~ 1570)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자는 경호(景浩)이다. 진보(眞寶) 또는 진성이 선생의 관향(貫鄕)이며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옹(陶翁)이라 하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이황은 1501년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이식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작은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고, 혼자 책읽기를 좋아했다. 1533년 진사로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은 이황은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 호조 좌랑 등을 거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승진을 계속하던 이황은 36세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이황은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아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인종에 이어 1545년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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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27.
JO-015 황희
황희 (黃喜 , 1363~145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호 방촌(尨村). 초명 수로(壽老). 시호익성(翼成). 개성(開城) 출생. 문과에 급제하여 상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숨어 살았으나, 이성계의 간청으로 조선의 벼슬에 올랐다. 사헌 감찰, 경기도 도사, 이조 정랑 등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다. 충녕 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귀양 갔으나, 그 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어 18년 동안이나 정승으로 있으면서 농사 개량, 예법의 개정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정승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여러 일화를 남겼다.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는 황희의 무덤이다. 팔걸이를 한 것 처럼 ..